최희준 - 진고개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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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 추억 가요

최희준 - 진고개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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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준 - 진고개 신사




본명이 최성준인 최희준은 해병대를 제대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3학년 때인 1957년 교내 축제에서 샹송(고엽)을 불러

입상한 뒤 1958년부터 미8군 무대에서 가요계생활을 시작하였다.
1960년 첫 작품인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여 스타반열에 오른다.
1961년 MBC라디오드라마주제가인 "엄처시하"와 1964년 영화주제가 "맨발의 청춘",  1965년 KBS라디오드라마주제가

"하숙생", 1967년 TBC라디오드라마주제가 "광복20년",  1967년 영화주제가 "팔도강산" 등을 연속 히트시키는 한편

1964년에는 대학출신 가수인 박형준(고려대), 유주용(연세대),이한필(위키리, 서라벌예대)와 함께  "포클로버스"를 조직해

활동하고, 솔로로도 진고개신사, 종점, 길 잃은 철새, 너구리 아저씨, 이별의 프랫홈, 옛이야기, 폭풍의 사나이, 빛과 그림자

같은 많은 곡들을 인기 가요 순위에 올리며 활약한다. 이후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진고개 신사'는 HLKV 라디오 인기 연속방송극이었고 최희준으 노래도 이미 인기곡이었다. 1964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진고개는 지금의 충무로 일대로 충무로 2가,  전중국대사관 뒷편에서 세종호텔 뒷길에 이르는 길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남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의 고개가 있었다. 

이곳은 비가 오면 진흙밭으로 바뀌어 "진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곳을 지나 이르는 곳에 남산골(지금의 남산 한옥마을 인근)이 있어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살았는데,  과거 준비를 하거나

낙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눌러 앉아 다음 과거를 준비하는 생원님(샌님)들이  모여 살았다. 

이들은 진고개를 지나기도 좋고 오래 신을 수 있어 주로 나막신을 신고 다녔기에 "딸깍발이"로 불렸다. 

(이희승 수필 "딸깍발이" 참고) 진고개(니현(泥峴))는 광무 10년(1906년, 순종 즉위년)에 언덕을 깍아내고 한국 최초의 

하수시설을 하여 우수와  하수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는 행정동이 바뀌며 본정1정목부터 5정목까지 구성되며 본정통으로 불리었는데 일본이 이곳에 일본공사관을

세운 1885년 무렵부터 일본인촌이 형성되어 본정(本町, 혼마찌)로 불렸기 때문이다. 
근처 예장동에는 일제 강점기 초기 총독부관저와 일본군 헌병대 주둔지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도 이곳은 진고개로 명맥을 이었으며 지금도 몇몇 음식점의 상호로 남아 있다.  
해방 이후 일제의 기를 잠재우기 위해 이곳을 이순신장군의 아호를 따서 "충무로(忠武路)"로 정했다가 지금은 도로명주소로

바뀌면서 명동길로 바뀌었다.

​진고개(니현 泥峴) -> 본정통(本町 혼마찌) -> 충무로(忠武路) -> 명동(明洞)길 을지로도 청나라의 조차지가 있던 곳으로 중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화교학교와 중국대사관이 이곳에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유에서 중국의 기운을 상쇄하기 위해 을지문덕 장국의 이름에서 따와 정한 지명이었다.
우리의 지명에도 아픈 역사가 숨어있다. 우리의 가요에서도 아픈 역사를 찾을 수 있다.

 

 

 

 

 

 

 

 

최희준 - 진고개 신사


미련없이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그 여인의 얼굴은

별마다 새겨보는 별마다 새겨보는

아, 진고개 신사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언젠가 불러주던 그 여인의 노래를

소리없이 불러보는 소리없이 불러보는

아, 진고개 신사

 

 

 

 

[출처] 가요(5060)/진고개 신사 - 최희준|작성자 첫발자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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