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숙자 - 눈물의 연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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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 추억 가요

최숙자 - 눈물의 연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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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자 - 눈물의 연평도




이미자와 같은 시대에 여자가수로 풍미하고 인기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최숙자는 여가수로서의 위치를 충분히 알만하다.
대표적인 히트곡인 "눈물의 연평도"는 지금은 사라진 연평도 파시를 증거하는 노래로 사회사적인 가치도 있는 곡.

​이 노래는 1964년 발표되지만 1959년의 한반도를 강타한 사라호 태풍이 배경이다.
비록 태풍이 할퀸지 5년이나 지나 발표되었지만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기도 전에  태풍 사라호에 큰 슬픔을 겪었던 연평도민은

물론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었다.

​이곡은 1964년 연평도에 사라호 태풍으로 희생된 어부들을 추모하는 추모비 제막식에서 발표되며 불렸다.
최숙자의 최고의 히특곡이자 인기 절정에 이르게 한 "눈물의 연평도" 내용은 가슴 아픈 우리내 선조들의 삶의 한 모습이지만

최숙자의 노래는 그런 감정을 포함해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어서 들을수록 깊은 감칠맛이 느껴지는 곡이다.

​연평도는 파도 위에 서는 시장이라는 의미인 파시(波市)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의 기록에도 연평도는 조기 산지로 이름 났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인천 앞바다와 연평도 근해로 천여 척이나

되는 조기잡이 배가 몰려들었다. 조기철은 4월 소만 사리 때로 바로 육지에는 봄꽃이 흐드러질 때이다.
이때를 "조기 생일"이라 불었고 조기잡이가 끝나는 5~6월을 "파송 사리"라고 했다.

​동중국해에서부터 점차 북상하는 조기떼는 영광군 앞바다 칠산탄을 지나 연평도 앞바다에 도착할 때쯤이 가장 살이 오르고

알이 차는 시기라 가장 크고 좋은 조기를 잡을 수 있었다.  
황해도 구월산* 아래 구월포에 가장 큰 조기시장이 열렸었고 조기를 실은 배는 한강, 대동강, 청전강, 임진강 등 강을 통해

상류까지 운반되었다.

​이런 조기 성업은 일제말 조선기술과 어업기술의 발달과 무분별한 조업으로 조기가 고갈되면서 세력을 잃기 시작하여

1950년대 말 사라호 태풍 이후 급격하게 줄면서 1960년 대 이후 연평도  파시는 사라지고 전설이 되었다.
특히 알이 밴 칠산탄 조기떼를 무분별하게 잡아 말려 판 영광굴비도 한 원인이 되었다.
이제 영광굴비니 연평도 파시니 하는 것도 지난 이야기가 되었다.

1950뎐대 까지만 해도 연평도에서는 "갈매기는 조기떼를, 어부들은 갈매기를, 색시들은 어부를 따랐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돈이 많이 풀리던 포구에 떠돌던 풍문이다. 연평도는 한 때 500가구, 인구 3000명에 이르는 섬이었다. 이때 술집 260곳이

있었고, 물새로 불리는 400명의 색시가 어부들의 주머니 속을 들췄단다.

연평도 조기 풍어기는 4월 중순 ~ 6월 초순께까지 약 50일 간으로 "사흘 벌어 1년 먹는다"는 말이 돌았고
골목길을 개도 지폐를 입에 물고 다녔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허튼 말이 아니다. 있을 때 자중하여 미래를 대비하고 더욱 진중하게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
있다고 무분멸하게 대하다가는 후회하게 되는 것이 세상사 진리에 가깝다.

 

 

 

 

 

 

 

최숙자 - 눈물의 연평도


조기를 담뿍 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 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태풍이 원수드라 한 많은 사라호

황천 간 그 얼굴 언제 다시 만나보리

해 저문 백사장에 그 모습 그리면

등대불만 깜박이네 눈물의 연평도

 

 

 

 

[출처] 가요(5060)/눈물의 연평도 - 최숙자|작성자 첫발자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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