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 평양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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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 낭만 가요

나훈아 - 평양 아줌마


나훈아 - 평양 아줌마




1971년 8월 당시 대한적십자회 회장이었던 최두선이 제안한 "남북적십자회담"이 8월 예비회담을 거쳐 1972년 8월 역사적인 

1차 본회담을 개최하게 되었다. 당시 1년 전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 암살 목적의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문 폭파사건을 무릅쓰고

제안한 이 회담의 목적은 오로지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이었다.

실향민을 포함해 전 국민의 지대한 관심과 희망 속에 1973년까지 7차회담을 이어가던 남북적십자 회담은 우리 정부의 6.23 

선언을 이유로 북한의 일방적 대화 중단 선언으로 찬물을 끼엊고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참고로 6.23 선언은 1973년에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과 호혜 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을 주 내용으로

하는 선언으로. 이후 1974년에는 평화통일의 3대 기본 원칙에 입각해서 북한에 대하여 상호불가침 협정의  체결을 제안했는데

북한은 이에 불만을 품고 한반도에 2개의 정부를 용인할 수 없다는 구실로 대화를 일반적으로 중단한 것이다, 

우리의 "비폭력 평화 우선 정책"과 북한의 "무력 통일 우선 정책"이 충돌한 것으로 이때 북한의 의도는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즈음 나훈아가 부른 곡이 "녹슬은 기찻길"이다.
북한은 남북적십자회담으로 남북이 왕래를 하게되자 폐쇄적이며 경제적으로 뒤쳐진 자신들의 처지가 불리해진 것을 알고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왕래 대화를 회피하였다. 

한국적십자회는 포기하지 않고 1977년까지 25차에 걸친 판문점 실무회담을 이어가면서 본회담을 촉구하는 한편, 

전체 이산가족 상봉이 어려우면 60세 이상부터 상봉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북한은 1978년 26차 실무회의 마저 돌연 중단하면서 국민의 기대는 사라진다.
대한적십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80년 다시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이후 계속된 한국의 대화 요구에도

묵묵부답에 1983년에는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까지 일으키며 전세계를 경악하게 한다.

​그러던 중 1984년 7월 한반도를 강타한 장마로 남한의 서울 경기 지역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망원동, 파주 등 저지대가 침수되고 사망자 189명, 실종자 150명, 부상자 103명, 이재민 23만명 등과 어마한 재산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9월 8일 북한은 갑자기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에 쌀 5만 석(약 7800톤),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 톤, 의약품 등을 

지원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제의하였다. 

이에 9월 14일에 대한적십자사가 북측의 제의를 수용하겠다고 공식 회답한다. 

북한은 버마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자초한 국제적 비난과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고 당시 서울에서는 이미 수해 복구가 

대부분 끝난 상태였음에도 우리는 대화의 기회로 삼기 위에 북한의 제안을 수용하게 된 것이었다.

​북한의 뒤늦은 지원 약속은 국제적 고립을 피하면서 생색은 낼 수 있는 기막힌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발표한 것이었고 

복구도 끝나가는 마당이라 어쩌면  거절을 할지도 모른다고 여겼갰지만, 남한에서 받겠다고 하자 이러한 지원품은 북한 전 지역의

창고를 다 비울 정도로 물건을 공출하고 심지어 중국의 원조를 받아 충당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보내온 물건의 질은 들쭉날쭉

천차만별이었다고 한다. 

 

시멘트는 건물을 짓기에는 품질이 열악해 재가공해서 88올림픽고속도로 포장에 사용하였다가 얼마 못가 균열과 파임으로

아스팔트로 재포장하는 비용과 수고를 들여야 했고 옷감과 의료품도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고 하는데 지원품을 받을 때

물품 자체의 도움보다 대화재게에 무게를 두었고 막다른 쥐의 퇴로를 열어주갰다는 정부의 결단이 작용한 것이었다.


​자신에게 씌워진 낙인을 지워보겠다는 북한의 입장에서도 기회가 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이런 사건으로 대화가 다시 이어지면서 북한이 마지못해 출구전략으로 수용한 1984년 남북경제협력회담과 1985년 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대동강 편지를 부른 나훈아도 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에 맞춰 공연을 위해 평양에 처음으로 간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고대하는 실향민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행각하고 만든 곡이 "평양 아줌마"다. 

평양에 고향을 두고 월남함 아주머니를 상정하고 고향을 그리는 가사를 쓰고 곡을 만 것이다.
​나훈아는 이때 이후 평양 공연을 하지 않는다.
노래하는 가수의 요구사항을 무시한 채  정권에서 요구사항이 많아서라고 하는데 북한 정권의 요구도 마땅찮고 거기 끌려다니는 

남한 점부의 요구에 맞춰 노래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훈아 - 평양 아줌마


오늘따라 지는 해가 
왜 저다지 고운지

붉게 타는 노을에 피는 추억
잔주름에 고인 눈물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리운 고향
엎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운 고향

아, 오마니 아바지 
불러보는 평양 아줌마

 



서산마루 지는 해는 
어김없이 넘어가고

무심하게 가고 오는 그 세월이
타향살이 어연 반 평생

가고파도 갈 수 없는 북녘 내 고향
한 맺힌 휴전선이 원수더라

아, 대동강아 모란봉아 
불러보는 평양 아줌마

 

 

 

[출처] 가요(7080)/평양 아줌마 - 나훈아|작성자 첫발자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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