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 - 전우여 잘자라
1950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이 수복된 직후 만들어져 전쟁 내내 국군의 진중가요로 가장 사랑 받았던 노래다.
9.28 수복 직후 명동에서 만난 유호와 박시춘이 하룻밤 새에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는 곡으로 당시 국군 군예대 제2중대
책임자였던 박시춘에 의해 연주되면서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파되고 인기를 얻게 된다.
이 곡을 처음 취입한 가수는 확실하지 않은데, 6.25 당시 같은 군예대 소속이었던 현인의 음반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현인이 원창자로 1950년 취입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당시 녹음은 전쟁 중에 모두 망실되었는지 들을 길이 없다.
무뚝뚝하면서도 비장한 느낌의 악곡에 매 절마다 전우의 죽음 목도하며 전우의 몫까지 다해 싸워 나라를 구해내고 진군하겠다는
비장미가 콧등이 시리도록 생생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곡은 서울 수복 후 압록강까지 진군하는 동안 이 노래만 불렀다고 얘기 될 정도로 애창된 곡이었지만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
하면서는 비극성 때문에 부르지 않기도 했던 눈물의 곡이다.
이곡의 작사자 유호는 기자 출신으로 방송극작가 겸 작사가로, 1950년 6월 서울 청파동의 골목에 살고 있었다.
전쟁 발발 3일 째 소련제 무기로 파도처럼 물밀듯 내려오는 북괴의 침공에 속수무책 먄몸으로 저지하던 국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단 얼마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한강폭파를 감행할 수 밖에 없었고 미처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이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는 절박한
상황. 피난을 가지 못한 유호는 집에서 멀리 서울역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철길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인민군들이 철길을 따라
몸을 낮추고 한강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 때 집 가까운 곳에서 숨찬 소리가 들려왔다. 언덕으로 뛰어 올라오늘 국군병사였다.
국군병사는 철모도 없이 헝겊으로만든 작업화에 총 한 자루만 갖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말이 아니었으나 눈빛만은 저주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돌계단 뒤로 몸을 숨기고는 인민군을 향해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그러나 그의 총에는 탄환이 떨어지고 없었다.
낙담한 그 병사는 총을 내 던지고 효창공원 쪽으로 향해서 뛰어 갔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된 이튿날 . 유호는 신문사로 나가 오랜만에 동료들과의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나오다가 박시춘을
만났다. 군예대를 따라 갔던 박시춘이 서울에 온 것이다.
이들은 다시 콤비가 되어 작품할동에 들어갔다.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고 "국군과 국민의 기를 올릴 노래를 만들자"고
눈빛이 통하자 유호의 머리에 석달 전 효창공원 쪽으로 사라지던 병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 "1992년 동아닐보 기사 가요100년 그노래 그사연 - 정두수" 중에서
지금도 효창공원에는 "북한 반공투사 기념탑" 등 6.25를 기억할 사료가 있다.

현인 - 전우여 잘자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저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숲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고개를 넘어서 물은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3.8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 같이 별 같이

[출처] 가요(5060)/전우여 잘자라 - 현인|작성자 첫발자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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