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원 - 이별의 인천항
박경원의 "만리포 사랑"과 더불어 큰 사랑을 받은 노래가 "이별의 인천항"인데 지역의 이름이 들어가면 그 지역의 사람들 뿐
아니라 타지의 사람들도 그 지역의 추억이 생각나서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데뷔곡이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 박경원은 작곡가 전오승을 인천 작약도로 초청해 이틀을 텐트에서 묶었는데 거기서 작곡한 곡이
"이별의 인천항"으로 박경원에게 이 곡을 주고 인천출신 박경원의 "이별의 인천항"은 그야말로 큰 인기를 얻는다.
1954년 곡이 발표되자 전파상에서는 하루 종일 이 노래가 울려나왔고 레코드점 앞에 가사를 적어 놓고 노래를 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사를 보고 합창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도로스의 사랑을 담은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는 박경원과 전오승이 처음
텐트를 치고 있으려 했다가 군인들의 훈련으로 무산된 월미도에 세워졌다.
작약도는 당시만해도 텐트를 치고 놀 수 있던 해수욕장이 있던 섬인데 지금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작약꽃봉오리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박경원은 1931년 인천 중구 신포동에서 태어나 신흥중학교를 나와 인천상업고등학교를 다니며 2학년 때부터 콩쿨대회를
쫓아다니며 콩쿨대회 단골이 된다. 콩쿨대회 단골로 이름이 난 박경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학교 6학년에 학도의용대 선무대에
입대하여 위문공연을 다니기도 한다.
동국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박경원은 대학교 2학년 때 김교성이 운영하던 계림극장 주최 전국남녀 가요콩쿨대회에 출연하여
1등에 입상한다. 다른 부모들과는 달리 가요를 부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던 덕에 박경원은 콩쿨대회 상장을 모으는 재미로
열심히 콩쿨대회를 나갔었다는 심정을 표하기도 했다. 1등에 당선된 박경원은 작곡가 전오승에게 발탁되어 대학 제학 중이던
1952년 오아시스레크드에 명국환과 함께 전속가수로 입사한다.
입사하며 1953년 발표한 첫 앨범에는 명국환의 "백마야 울지마라"와 박경원의 "비애 부르스"가 실렸으며 두 곡 모두 인기를
얻으며 입사동기인 두 사람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박경원은 음정 박자가 정확하고 발성이 유려한 정통파 가수로
"비애 부르스"로 데뷔한 후 "이별의 인천항", "만리포 사랑", "나포리 연가", "청춘은 산맥을 타고", "내 사랑" 등 청춘의 화려한
감상과 낭만이 번져있는 정감어린 곡을 많이 불렀다.
전운이 가시고 영화와 가요게도 정상화되면서 박경원은 영화출연과 영화주제가를 부르고 인기가요 를 발표하고 가수로서
활동하다가 2007년 76세에 노환으로 별세한다.

박경원 - 이별의 인천항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갈매기도 슬피 우는 이별의 인천항구
항구마다 울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정들자 이별의 고동소리 목메어 운다
등대마다 님을 두고 내일은 어느 항구
쓴웃음 친 웃음에도 순정은 있다
항구마다 울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작약도에 등대불만 가물거린다

마도로스 수첩에는 이별도 많은데
오늘밤도 그라스에 맺은 인연을
항구마다 품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물새들도 눈물 짖는 이별의 인천항구

[출처] 가요(5060)/이별의 인천항 - 박경원|작성자 첫발자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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