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이스 - 해변으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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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

키보이스 - 해변으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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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이스 - 해변으로가요



 

키보이스 '해변으로 가요' (1970) 그룹사운드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시대의 노래였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글자 몇 개로 이루어진 이 문장에

절로 멜로디가 달라붙어 나온다. 어떤 이들의 두개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코러스 파트 “해변으로 가요”를 제 맘대로 더하고는 저 뒤에서

들려오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해변으로 가요’는 당대에

크게 히트했을 뿐만 아니라 그룹사운드 시대의 개막을 알린 곡이자

낭만의 상징이고, 후대에도 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쳐 이른바 ‘국민가요’의 반열에 올랐다.

 

앰프에 연결해야 소리가 난다고 앰프기타라고도 했고,

아직도 어떤 이들이 전자기타라고 지칭했다가 면박을 당하게도 하는

전기기타의 등장은 음악의 판을 흔들어놓았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서구의 팝 음악이 전파되는 동시에

그들을 위한 무대에서 기량을 닦는 음악인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하나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그룹사운드의 시대가 열린다.

 

 

 

 

한국 최초의 그룹사운드가 누구냐는 물음은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결성 시기와 앨범을 발표한 시점 등 여러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때마다 언급해야 할 이름들로 코끼리와 애드 훠(Add 4)

그리고 키보이스(Key Boys)가 있다. 당시 미8군 무대에서

락앤키(Rock & Key)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밴드가 이제 막 청년이 된 소년을

스카우트 하며 대중적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들의 다른 이름이 바로 키보이스였다.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미군 하사관에게 기타를 배우고

일찌감치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기타신동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대학새내기가 김홍탁이고,

그를 제외한 오리지널 멤버는 윤항기 와 차중락, 차도균과 옥상빈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장안의 스타로 등극했고, 한국 그룹사운드 역사의 맨 앞줄에 기록된다.

 

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해변으로 가요’는 단숨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한 세대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가수들에게 리메이크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가요사의 수치스러운 장면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해변으로 가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 노래의 진짜 주인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에는 저작권 개념이 희박했고 번안곡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키 보이스’의 노래들도 상당수가 번안곡이었다.

‘해변으로 가요’ 역시 일본 노래의 번안곡이었는데,

워낙에 히트하면서 언젠가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66년, 일본 밴드인 아스트로 제트(Astro Jet)의 리더이자 재일 교포인이철은

‘고히비토타쓰노 하마베(해변의 연인)’를 작곡했다.

그는 1967년에 한국을 찾아 공연하면서 다른 이에게 부탁하여

이 곡을 한국어 노랫말로 바꿔 들려주었다. ‘ 해변의 연인’이 맘에 든 키보이스는

자신들이 이 곡을 부르기 로 하고 허락을 구했다고 하지만,

정작 음반에는 원작자의 이름 이 없었다. 후에 작사•작곡가의 이름이 수정되는데,

그 자리는 엉뚱하게도 김희갑을 거쳐 키보이스 2기 멤버였던 장영의 이름이 채우게 된다.

 

무려 37년이 지난 후인 2007년에야 한국의 법정은 원래의 주인 을 인정했다.

훔친 노래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될 수 있었던 시대,

그리고 ‘대중가요는 대중이 검증한다’는 주장, 이 모두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그러나 키보이스는 다른 의미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대중의 기호를 따르는 활동과

번안곡 연주에 만족하지 못한 김홍탁은 좀 더 색다른 음악, 다시 말하여 록 음악을 하고 싶었다.

장차 기타의 가능성을 넓혀놓게 될 그가 키보이스를 떠나 결성 한 밴드가 히화이브(He 5)였고,

구성원에 변화가 생기며 확대 된 팀이 히식스(He 6)였다. 또 다른 전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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