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김 - 이별
김혜자는 1956년 국무총리배 판소리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실력
을 인정받고 1959년 린다김이라는 이름으로 미8군 쇼무대에 데뷔
하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국 여가수 패티페이지처럼 되겠다고 이름
을 패티김으로 바꾸고 활동하기 시작한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하였고, 1971년
에는 디너쇼도 시도한다.
1966년에는 한국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애랑역을 맡아
곽규석과 호흡을 맞추었고 "살짜기 옵서예"를 성공시킨다. "살짜기
옵서예"는 1967년 앵콜공연을 하는데, 길옥윤과 결혼하여 신혼여행
중이어서 김상희가 애랑역을 맡았다.
패티김은 1966년 길옥윤과 결혼하였고 1973년 9월 이혼하는데
패티김과 길옥윤, 박춘석과의 관계는 특별하다.
길옥윤(본명 최치정)이 서울대치대(겅성대 치대)를 다니며 기타를
치고 있을 때 경기중학생이던 박춘석을 대중음악계에 데뷔시켰고,
박춘석이 작곡가로 먼저 성공하자 길옥윤은 박춘석의 도움으로
작곡가로 데뷔한다.
한편 박춘석이 패티김을 데뷔시켰고 패티김은 길옥윤과 결혼하면서
길옥윤 사단으로 옮겨 "구월의 노래"를 시작으로 "내 사랑아" "사월
이 가면", "사랑의 세레나데", "별들에게 물어봐", "사랑이란 두글자",
"사랑하는 마리아","사랑과 이별", "사랑하는 당신이", "서울의 찬가"
등 사랑스런 노래를 잇달아 히트시켰으나 둘 사이의 사랑이 식으며
별거 중이다가 1973년 길옥윤의 연민이 가득한 앨범 "이별"을
내놓고 이혼한다.
이 앨범은 애틋한 사연과 함께 동남아를 강타하며 큰 히트를 하지만
이후 패티김은 다시 박춘석 사단으로 옮겨 활동한다.
길옥윤과의 꿈결 같던 결혼 시기의 아름다운 사랑 노래로 여울져
있다면 "이별"은 아름다운 추억을 더욱 가슴저리게 하는 아시아의
명곡으로 자리매김한다.
길옥윤이 이 노래를 만들 때는 둘은 별거 중일 때였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길옥윤은 뉴욕하늘을 보면서 패티김을 생각했고
이 노래를 쓴다.
압고를 패티김에게 보냈고 제목은 "어쩌다 생각이 나겟지"였다.
패티김은 긴 제목이 맘에 들지 않아 길옥윤에게 절화를 걸어
"이별"로 하자고 제의했고 길옥윤은 승락한다.
그리고 이 둘은 이혼 절차로 들어간다.
이 노래는 이혼을 상정한 곡으로 히자되면서 대중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패티김 - 이별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거야
때로는 보고파 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 날을 후회할꺼야
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 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거야
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 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거야
잊을 수는 없을거야 잊을 수는 없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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